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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시대의 반영이나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를 이루어 간다.』

 

- 마쓰모토 세이초 - 

 

마쓰모토 세이초.jpg

마쓰모토 세이초

 

채해병 사건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같다

 

채해병 연합뉴스.png

출처-<연합뉴스>

 

“채해병 사건의 자료들을 계속 들여다보면, 마치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을 보는 것 같아.”

 

일주일 전이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지금껏 정리해 놓은 채해병 사건 파일을 보여주며 말을 건넸다. 사실은 나올만큼 나왔고 추정도 나올만큼 나왔으나 납득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한다. 빈틈을 메꾸기 위해 국방 분야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별 생각 없이 며칠이 지났으나 그 말이 속에 남았나 보다. 문득 역순으로 사건을 조립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한참 들여다보는데, 머릿속에 몇 가지 이름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묘한 여운이 실린 공명.

 

“사회파 추리 소설과 너무 흡사하다.”

 

문학도들에게 마쓰모토 세이초는 경외의 대상이다. 그는 42세 늦깎이로 데뷔해 82세 임종 때까지 무려 1천 편 이상의 작품을 내놓은 천재다(픽션, 논픽션 가리지 않고 글을 썼는데, 양쪽 분야 모두에서 엄청난 성과를 일궈냈다). 

 

그가 죽기 3년 전에 썼던 유서에 남긴, 

 

『나는 노력만은 해왔다.』

 

라는 유언은 글을 쓰는 모든 이들(세이초의 인생을 아는 문인이라면)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가, 

 

“사회파 추리 소설의 거장”

 

이다. 창시자란 말도 있지만, 그가 쓰기 이전에도 몇몇 이름이 거론되는 작가들이 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일본에서 ‘사회파 추리 소설’이 하나의 장르가 된 건 세이초가 『점과 선』을 발표한 이후부터였다. 

 

화차.png

 

사회파 추리 소설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자면, 영화 <화차>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거 같다. 영화 <화차>는 ‘세이초의 장녀’를 자처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사회파 이전의 추리 소설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셜록 홈즈와 같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게 주요 내용이었는데, 사회파의 경우는 대부분 초반에(그것도 극초반에) 범인을 알려준다. 

 

소설 화차.jpg

한국에서도 출간된 소설 ‘화차’  

 

그리고 이야기의 대부분을 범인의 ‘범행 동기’를 쫓아간다. 영화 <화차>를 보면, 빚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여주인공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사회파 추리 소설은 사건을 통해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형식의 추리소설이다. 10여 년 전에 나온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이전의 <공중그네> 같은 작품을 보면서, 

 

“재미있는 작가네”

 

라고 생각했는데, 본격 사회파 소설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올림픽의 몸값>을 보면서(그 이전에 <남쪽으로 튀어>부터 슬슬 느낌이 오긴 했다), 

 

“사회파였네.”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올림픽 개회식을 인질(?!)로 국가로부터 몸값을 요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부차적인’ 이야기다. 오쿠다 히데오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 과정에서 당시 일본 사회의 문제점(지금 사회의 문제점이기도 한)인 ‘부의 분배와 사회의 역할’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은 그런 형식이다. 

 

채해병 사건이 그러하다.

 

사회파 추리 소설처럼 단순하다

 

채해병 사건은 단순하다. 단순하다 못해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수백쪽에 달하는 문서를 보고 죽돌 편집장에게 보낸 문자는  

 

“마치... 사회파 소설을 보는 느낌이다”

 

“세이초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다”

 

... 였다. 이 비극적인 일에 이런 문자를 보내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허나 인권위 조사결과보고, 김계환 사령관의 텔레그램 문자 내역, 변호사들의 녹취 파일, 사건 경과 기록, 해군 관계자 지인의 비공개 정보 등 수많은 사건 자료와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특검 관련 기사들, 정치권의 반응까지 합치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사회파 추리 소설을 현장에서 바라보는 듯하다.   

 

박정훈 김계환.png

 

마치 내가 혼마 슌스케(소설 '화차'에서 부상으로 휴직 중인 형사다... 너무 감정이입을 했다)가 되어 세키네 쇼코... 아니, 신죠 쿄코(영화 <화차>의 김민희를 떠올리면 된다)를 쫓아가는 느낌이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 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소설 <화차>의 한 대목이다. 유명한 대사인데, 죽돌 편집장과 문자를 나누다 이 대사가 머리를 스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어디의 누군가는 계속 허물을 벗고 있다. 어디의 누군가는 모두 다 알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누가 했는지 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 늘 그래왔듯 다리가 나올 거란 희망을 가지고 계속 허물을 벗고 있다. 목숨을 걸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그렇다. 온 세상이 범인을 안다. 

 

윤석열 이종섭.jpg

출처-<대통령실사진기자단>

 

사회파 추리 소설이 그러하듯 초반에 ‘범인’이 누군지 다 나와 있는 셈이다. 우리는 사건을 쫓아가며 범인이 누군지를 확인하고, 추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파 추리 소설은 범인이 누군지 보다, 범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범행 동기와 그 주변을 이루고 있는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세이초가 말하지 않았는가?

 

“내용은 시대의 반영”

 

어쩌면, 이번 사건의 추적을 통해 우리는 검찰과 권력의 속성을 실시간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가 혹여 딴지일보 지면에 올라간다면 이는 순전히 나의 추측이며 망상이라 봐주길 바란다.  

 

자.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범인의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채해병 사건은 어디부터 시작되었나

 

1장. 갇혔다

 

2022년 8월 8일 밤 

 

SBS 폭우.jpg

출처-<SBS>

 

서울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후 최대의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 동작구는 시간당 최대 141mm라는 믿지 못할 수치를 기록했다. 1년 전이었다면, 대통령은 청와대의 ‘국가위기관리센터(속칭 청와대 지하 벙커, 이곳에서 NSC 회의를 열었다)’에서 재난관리자들을 소집해 회의를 하거나 아니면 화상회의를 주재했을 거다.

 

태풍 하이선.jpg

태풍 하이선이 왔을 당시

문재인 정부의 NSC 회의

 

이곳은 긴급 상황에 대비해 재난관리자, 관계 장관들과 실시간으로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을 자랑했다. 덤으로 한반도와 그 주변의 정보 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와대 관저에서 벙커로 들어가 회의를 주재했어야 할 대통령은 이곳에 없었다. 청와대는 이미 관광객들이 점령한 상황. 

 

대통령은 서초동 자택에 ‘갇혔다’.

 

홍수 출처 트위터.jpg

그날 밤, 서초구 상황

출처-<트위터>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폭우 앞에서 대통령은 오도 가도 못하고, 서초동에서 전화로 지시를 내렸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과 통화하며 실시간으로 대응했다.”

 

대통령 자택 인근 도로가 침수돼 대통령이 갇혀 있는 상황. 대통령은 청와대를 버리고, 다른 관저를 물색하다 한남동 외교부 장관 공관을 낙점했다. 용산 대통령실과 5분 거리라 말했지만, 장마로 리모델링 공사가 계속 지연돼 대통령은 서초동 자택에서 출퇴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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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통령의 서초동 자택

출처-<뉴스1>

 

네이버 지도.png

당시 서초동 자택부터 대통령실까지

(by 자동차)

출처-<네이버 지도> 

 

당시 상황은 야당 대변인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무조건 대통령실과 관저를 옮기겠다는 대통령의 고집이 부른 참사”

 

멀쩡한 위기관리센터를 두고 왜 아파트에서 전화를 거냐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통령이 청와대를 버린 이유에 대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무속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리고 무리수를 뒀다. 

 

2022년 8월 9일

 

대통령은 어젯밤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아니, 대통령이라면 으레 하는 ‘관례’를 따랐다는 게 맞겠다. 

 

윤석열 신림동 방문 연합뉴스.png

출처-<연합뉴스>

 

대통령은 정오가 다 돼 갈 무렵 노란색 민방위복을 차려입고는 신림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13분간 대통령의 ‘모습’을 연기했다. 

 

“아, 주무시다가 그랬구나”

 

쪼그려 앉음 뉴스1.png

출처-<뉴스1>

 

퇴근하면서 보니까.jpg

 

대통령이 갇혀 있는 동안, 신림동의 한 다세대 주택의 일가족 3명도 갇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대통령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에 안전하게 갇혀 있었고(그 안에서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신림동 반지하 방에 갇혀 있던 일가족 3명은 ‘죽었다’.

 

일가족 3명 뉴스1.jpg

출처-<뉴스1>

 

대통령이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에 있었다고 해도 신림동 세 가족은 죽었을 수 있다. 불가항력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런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은 언제든 필요하면 깨어있어야 하고, 늘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자리다. 그렇기에 전임 대통령 중 한 명은 만찬 자리에서도 포도주 대신 주스를 마시며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려 애썼다. 

 

죽음을 막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죽음은 알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대통령은 갇혀 있었다.   

 

대통령실은 다급했던 듯, 아니 대통령이 지금까지 입에 달고 말하는 그 ‘홍보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서인 듯 대통령실 홈페이지와 SNS에 홍보용 카드뉴스를 만들어 올렸다. 

 

카드뉴스.jpg

출처-<대통령실>

 

애도를 표하고 안전사고 예방과 신속한 피해복구를 말하면, 무난하게(?!) 넘어갔을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홍보용 카드뉴스라니...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고, 언론은 맹공을 퍼부었다. 카드뉴스는 내려갔다. 

 

그리고 8월 11일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이 또 한 번 불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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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피해를 크게 입은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 ‘봉사 활동’ 한다는 명목으로 가서 한 말이다. 국민의힘에 속한 정치인이 모두 이런 생각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때와 장소가 좋지 않았다. 

 

동작구 남성사계시장.jpg

남성사계시장

 

당시 남성사계시장은 이런 상황이었고, 불과 이틀 전에 신림동에서는 일가족 3명이 참변을 당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 의원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대통령으로서는 신경을 안 쓸 수 없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다들 화를 누르는 기색이었다. 대통령이 사건 현장에 검정색 구두를 신고 와도, 쪼그려 앉아서 사진을 찍어도, 그걸 카드 뉴스로 돌려도, 여당 의원이 막말을 해도... 국민 중엔 아직 그를 이해해 줄 사람들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아직 대통령은 취임한 지 100일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