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이번 서울시의 종량제 강화방안은 시민의 자발적 협조를 얻기에는 너무나 많은 불편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책의 성공은 그것이 얼마나 현실성을 갖고 있느냐에도 크게 좌우됩니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 내용을 확인해 과태료를 물린다는데, 하루에 버려지는 봉투의 숫자를 생각해 볼 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리고 쓰레기 봉투를 뒤지는 것과 관련해 일어날 수많은 불쾌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올 지경입니다. (예전 독재정권 시절에 경찰이 길에서 학생들의 가방을 뒤지던 불쾌한 경험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네요.)
'세상에는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해인가 성매매의 비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나온 슬로건이다. 나는 분명하게 몸을 사고파는 것보다 정신을 팔고사는 것이 더 옳지 못한 일이라고 믿는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고 연금이 노후를 보장해주는데도 그 자리를 이용해 돈을 주고받는 비열함.... 세상에 돈으로 거래할 수 없는 것은 성매매보다 그쪽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문제는 수십억을 호가하는 종마가 교미 과정에서 암말의 뒷발굽에 채여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시정마다. 일명 애무하는 말. 시정마는 암말에게 작업을 건다. 뒷발질하고 뿌리치는 암말을 어르고 달래서 암말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하는 잡종말이다. 두세 시간에 걸친 시도 끝에 암말이 흥분하여 상대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면, 시정마는 끌려나온다. 공들여 흥분시킨 암말을 눈 앞에 두고 끌려나오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소리도 지르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냥 질질질, 끌려 나온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보고서가 말해주듯 한국사회 내에서의 계층이동은 완벽히 고착상태다. 저소득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가난의 대물림을 탈피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 자산도 없는데다 직업도 변변치 않기 때문이다. 직업이 변변치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해서다. 출생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할 리 만무하다. 천하를 주름잡던 제국도 신분이동 혹은 계층이동이 고착상태에 처하면서 붕괴했다. 신분이동 혹은 계층이동이 막힌 사회에서 메인스트림은 타락하고, 하류인생들은 절망한다. 대한민국도 이미 그 악순환의 고리에 갇혔다.
영화는 루이스 블룸이라는 미친놈을 통해서 언론 행태의 극단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더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고물상에서도 안 받아주던 이 미친놈이 재능을 인정받고 성장하는 업계다. 뉴스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언론사는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그 방면의 선수들일 업계 사람들이 '몰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 <나이트크롤러>는 미친놈이 미친놈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야기다. 왠지 이 영화를 보면서 '나라면 저렇게 안 하지' 따위의 훈수를 둘 사람이 이 땅에도 많을 것 같다.
우리가 한글과 영어처럼 친숙한 문자와 생전 처음 보는 언어를 조화롭게 표현하기 위해 노토 폰트를 고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외국인 또한 낯선 한글을 편하고, 제대로 쓰기 위해 노토 폰트를 선택할 수 있다. 즉 노트 폰트가 서체 선택의 1순위로 자리잡을 가능성은 모든 이에게 통용된다는 뜻이다. 피땀 흘려 만든 각종 한글 서체들이 어느새 '노토 코리안 외 기타'로 분류된다고 상상해 보자.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이 흔할까. 즉각적으로 인식되며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각 언어의 힘을 고려해볼 때 지금 구글이 쿨하게 뿌린 아이콘과 서체는 21세기 새로운 바벨탑을 구축하는 데 손색이 없다.
언론에서는 이번 사건에 출동한 경찰관들에게 방탄복이 없었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데, 사실 이 정도로 대응체계가 없다면 방탄복의 유무는 정말 사소한 문제다. 설령 방탄복이 있었다 한들, 총기도 없이 범인을 설득하겠다고 덜컥 들어가는 식의 대응이면 해당 경찰관의 목숨을 보장할 방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방탄복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최초 공격을 막아내는데 사용하는 물건일 뿐이다. 이번처럼 테이저만으로 무장하고, 심지어 범죄자와 거두절미하고 대면하겠다고 나서는 경우에도 착용자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